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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은 언뜻 보기에는 정리된 과학 인식론의 철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몽상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내밀성의 뒤에는 과학 철학자, 물리학자, 사상가로서의 바슐라르의 모습이 숨어있다. 과학의 결함을 시로 메우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메워야 한다고 말한 그의 탐구가 담겨 있는 이 작은 책에서 시와 과학의 접점에서 촛불을 바라본 바슐라르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촛불의 미학
서론
불꽃의 응시는 우리들을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몽상가의 세계를 확대시킨다. 불꽃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현존이지만, 불꽃 곁에서 사람은 멀리, 너무나도 멀리 꿈꾸려고 한다. 불꽃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세계다. 그래서 몽상가가 불꽃을 향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시인인 것이다. 세계를, 운명을 확대시키고 불꽃의 운명에 대하여 명상함으로써 몽상가는 언어를 확대시킨다.
램프의 몽상가는 작은 빛의 이마주(이미지)란 것이 내면의 등불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어스름한 빛은 사고가 움직이고 의식이 아주 뚜렷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사고가 멈추면 작은 빛은 밤새 움직인다. 의식의 명암에 대한 의식은 존재가 거기에서 눈뜸을 기다리는 양상, 즉 지속하는 양상을 갖고 있다.
몽상과 밤의 꿈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밤의 꿈에서는 모든 것이 허위의 빛 속에 있다. 때때로 꿈꾸는 사람은 여기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보고, 풍경이 너무 뚜렷하여 꿈은 쉽게 문학을 만들어낸다. 문학을 만들어 내지만, 결코 시를 만들지는 못한다. 환상같은 모든 문학은 꿈속에 작가의 아니무스가 그곳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도식으로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자가 꿈의 이미지를 연구하는 것은 아니무스 속에서다. 이마주(이미지)란 이중의 것으로 항상 그 자신과는 별도의 뜻을 갖고 있다. 이미지를 즐기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는 모든 지식의 영역 밖에서 시적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니무스에서의 꿈이 적으면 적을수록 아니마에서의 몽상이 많아진다. 즉 지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감수성이 커지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구별은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심리학적 용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아니무스(animus)는 라틴어로 '정신'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남성적 요소를 가리키며, 아니마(anima)는 '혼'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여성적 요소를 가리킨다. 바슐라르는 자신의 저서 「몽상의 시학」에서 이것을 자세하게 논하는데, 밤의 꿈은 아니무스에 속하고 몽상은 아니마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특히 아니마의 의미를 강조한다.
밤을 지새는 약한 불꽃과 꿈꾸는 정신 사이에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다. 양쪽 모두에게 시간은 느리다. 여린 불빛의 편이나 꿈꾸는 편이나 같은 인내가 작용하고 있다. 이때 시간은 심화되고, 이미지와 추억이 합해진다. 불꽃의 몽상가는 그가 현재 보고 있는 것과 과거에 보았던 것을 결합시킨다. 상상력과 기억과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그때 그는 몽상의 모든 모험을 향하여 스스로를 개방한다. 위대한 몽상가들의 길을 받아들이고 시인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근본에 있어서 단일한 저 불꽃의 몽상이 다양성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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